| 한국사연구회총서 |
3・1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지역적 전개
윤경로, 박찬승, 김승태 저 외
25,000원
25,000원
판매중
경인문화사
종이 표지
152*224mm(A5신)
388쪽
2019년 2월 28일
9788949947938
책 소개
2019년은 3・1운동 1백주년을 맞는 해이다. 이에 2018년 12월 7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는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주최, 한국사연구회 주관으로 “3・1운동은 어떻게 전국으로 확산되었나”라는 주제의 학술심포지움이 열렸다. 이 심포지움에서는 모두 8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책은 심포지움 이후에 발표원고를 수정 보완하여 한국사연구회에서 연구회총서로 발간한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은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다시 짚어보고,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과 만세시위 양상이 지역별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주로 밝혔다. 3・1운동은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 원칙을 내건 운동이었다. 따라서 만세운동은 평화적인 운동으로 대부분 진행되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일제 군경이 시위 주동자를 체포해간 경우, 이를 탈환하기 위해 헌병분견소나 순사주재소를 습격한 경우도 있고, 평소 원성이 자자했던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장부를 찢거나 뽕나무묘목을 불태워버리는 경우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은 일부 지역이지만 초기부터 공세적인 시위를 전개한 경우도 있었고, 또 전국적 확산과정에서 후기로 갈수록 시위양상이 더욱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방향으로 바뀌어갔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 이와 같은 공세적 시위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만세시위가 독립운동이라는 성격 외에도 ‘'민란’적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제1부에서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짚어보고, 제2부에서는 초기의 만세시위, 제3부에서는 중기의 만세시위, 제4부에서는 후기의 만세시위를 짚어보는 식으로 구성되었다. 전기, 중기, 후기에는 주로 각 도별 시위들을 배치했고, 각 논문들은 각 도의 시위 가운데 격렬했던 2~4곳의 시위들을 다루었다. 제2, 3, 4부에 배치된 각 도별 시위가 시기적으로 꼭 초기, 중기, 후기의 시위에 맞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다만 대체로 각 논문이 다루고 있는 시위가 어느 시기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가를 기준으로 하여, 시기별로 논문을 나누어 배치한 것이다.
이하 각 논문의 주요 논지를 살펴보자. 제1부에 실은 윤경로의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의 역사성과 현재성」이라는 글은 3・1운동의 명칭을 ‘3・1혁명’으로 바꾸어 부를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것은 3・1운동의 과정에서 주권재민의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최근 3・1운동을 3・1혁명으로 고쳐 부르자는 제안이 학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앞으로 이와 관련한 논의가 진행될 때 반드시 참고해야 할 논문이라고 생각된다.

제2부에는 주로 3월 초순에 전개된 초기의 3・1운동을 다룬다. 박찬승의 「만세시위의 기폭제가 된 서울시위」에서는 서울의 시위가 1차 시위(3월 1일)은 중등학교 학생, 2차 시위(5일)는 전문학교 학생, 3차 시위(22~26일)은 노동자 등으로 주체세력이 바뀌어 갔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3월 1일 시위대가 혼마치 2정목(현재의 충무로 2가)으로 모여든 것은 시위대의 최종 행진 목표가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였기 때문이었으며, 따라서 총독은 급히 조선군 사령부에 요청하여 군대를 동원해서 이를 막았음을 밝혔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논문은 북한 지역의 3・1운동에 관한 글들이다. 김승태의 「북한지역의 선구적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에서는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은 경기도의 서울과 고양, 평안북도의 의주와 선천, 평안남도의 평양, 진남포, 안주, 함경남도의 원산, 그리고 황해도의 해주의 9곳인데, 서울과 고양을 제외한 7곳이 현재의 북한지역이라는 것을 밝혔다. 이 글은 그 이유가 그곳에 기독교계 인맥과 교회, 학교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성주현의 「평안・황해지역의 공세적 만세시위」는 평안도지역과 황해도 지역에서는 3・1운동 초기부터 공세적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밝혔다. 이들 지역의 만세시위는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그리고 공세적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중에 대표적인 곳이 강서군과 맹산군, 그리고 수안군의 만세시위로서, 이 지역에서는 초기부터 헌병분견소와 면사무소 등 관공서를 습격하고 헌병을 살해하는 등 격렬한 공세적 시위가 전개되었음을 밝혔다. 맹산군 시위의 경우, 현장에서 54명이 군의 총에 맞아 즉사했는데, 이는 총독부 경무국 통계에서도 전국에서 가장 큰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제3부에서는 3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중기의 3・1운동을 다룬 논문들을 실었다. 이 시기에는 운동의 중심이 중남부지역으로 옮겨졌다. 여기에 실린 첫 번째 논문은 이정은의 「경남 중부지역 만세시위의 점이적 성격」이다. 남부지방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가 전개된 곳은 경상남도였다. 이 논문은 그 가운데에서도 격렬했던 경남 창녕군 영산과 함안군 함안면의 시위를 다루었다. 3월 13일 창녕군 영산면 시위는 서울에서 민족대표 33인이 구성된 것과 유사하게 청년들이 24명의 ‘결사단’을 조직하여 시위를 주도했다. 3월 19일 경남 함안군 함안면 시위는 더욱 공세적으로 전개되었다. 면내 각지에서 각 시위들이 한 동리 또는 면의 고립적인 단독 시위가 아니라 동리와 동리, 면과 면이 상호 연대하여 추진되었다.
두 번째 논문은 심상훈의 「경북지역의 만세운동」으로 영덕, 안동의 사례를 다루고 있다. 학술심포지움에서는 경북지방을 다룬 논문이 따로 발표되지 않아, 책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필자에게 특별히 원고를 청탁하여 실은 논문이다. 이 글에서는 영덕군의 경우, 남쪽지역은 평화적인 시위가 전개되었으나, 북쪽 영해지역에서는 지역 소외에 대한 불만으로 처음부터 공세적인 시위가 전개되었다는 것, 안동지역에서는 기독교측이 운동을 준비하는 경우들이 있긴 했으나, 운동을 끌고 간 주역은 주로 유림과 민중이었다는 것 등을 밝혔다.
세 번째 논문은 한규무의 「종교계 중심의 호남지역 만세시위」이다. 호남지방은 경남이나 충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위의 규모도 작고 횟수도 적었다. 그것은 1910년 직전 의병전쟁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렀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호남지역 만세시위를 천도교와 기독교계가 주도했으며, 전체적으로는 기독교인의 비중이 천도교인의 비중보다 컸다고 보았다. 특히 전라남도는 기독교인이 천도교인를 압도했고, 전라북도도 기독교인이 천도교인보다 우세했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기독교측이 ‘교회’ 조직 외에도 ‘학교’나 ‘병원’과 같은 근대적 기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제4부에서는 후기의 만세시위, 특히 충남과 경기 지역의 만세시위를 다루었다. 첫 번째 논문은 김진호의 「충남지방의 횃불 독립만세운동」이다.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지역에서는 ‘산상 야간 횃불시위’라는 독특한 시위양상이 나타났다. 이는 일제의 직접적인 탄압을 피하면서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3월 23일 연기군 조치원 북면, 남면, 서면 면민에서 시작하여 4월 17일 보령 주산면 주렴산의 횃불만세에 이르기까지 26일간에 충청남도 14개 군 가운데 12개 군에서 64개면, 216개 마을에서 238회 이상의 횃불만세 시위에 약 1만 명이 참여하였다. 이러한 운동으로 45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겪었으며, 대부분의 참여자는 경찰서, 헌병대에서 즉결처분을 통해 태형(60도에서 90도)을 당했다.
두 번째 논문은 박환의 「경기도 남부지역의 정면 대결 시위」로, 수원과 안성지역의 시위를 다루었다. 3월 하순에서 4월 초순에 걸쳐 경기도 지역에서는 수원, 화성, 안성 등지에서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이 글은 그 가운데에서 전국에서 가장 격렬했던 시위 현장인 수원군 우정면 화수리 항쟁에 주목한다. 화수리 항쟁은 그동안 제암리 희생지에 묻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글은 일반적으로 3・1운동의 경우 일반적으로 평화적인 만세시위를 연상하는 경우가 많지만, 화성지역의 경우 3월 29일 송산면에서 노구찌 순사를 처단하였으며, 화수리에서도 역시 가와바다 순사를 무력으로 처단하는 등 격렬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상에서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을 간단히 소개했다.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은 3・1운동을 단순히 평화적인 만세시위운동으로만 볼 수 없게 한다. 그렇다면 왜 그와 같은 공세적인 시위, 민란과 유사한 시위들이 나타났는지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앞으로 이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목차
서 문


제1부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의 역사성과 현재성 ∥ 윤경로


제2부 초기의 만세시위

만세시위의 기폭제가 된 서울시위 ∥ 박찬승

북한지역의 선구적 독립선언과 만세시위
- 의주, 평양, 원산, 함흥을 중심으로 - ∥ 김승태

3.1운동과 공세적 만세시위의 전개
- 강서군・맹산군・수안군을 중심으로 - ∥ 성주현


제3부 중기의 만세시위

경남 중부지역 만세시위의 점이적 성격
- 창녕군 영산 및 함안군 함안읍 시위를 중심으로 - ∥ 이정은

경북 지역의 만세운동
- 영덕, 안동을 중심으로 - ∥ 심상훈

종교계 중심의 전라도 만세시위
- 선행연구 검토와 향후과제 제시를 중심으로 - ∥ 한규무


제4부 후기의 만세시위

충남지방의 횃불독립만세운동 ∥ 김진호

경기도 남부지역의 정면대결 시위
- 수원, 안성지역을 중심으로 - ∥ 박 환
저: 윤경로
한성대학교 명예교수
저: 박찬승
저: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저: 성주현
숭실대학교 HK연구교수
저: 이정은
저: 심상훈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정보센터장
저: 한규무
광주대학교 호텔관광경영학부 교수
저: 김진호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
저: 박환
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