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한국학연구총서 132 |
최치원의 역사인식과 신라문화
김복순 저
2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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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
경인문화사
양장
152*224mm(A5신)
310쪽
2016년 7월 20일
9788949942070
책 소개
최치원은 스스로를 썩은 선비라고 칭하였을지언정, 현실정치에 매진하고 시무책을 올리는 등 유학자임을 잊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조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불교와 도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때문에 그에게는 심지어 “갓과 신을 숲 사이에 버려두고 간곳을 몰랐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30)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이야기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여러 설화를 양산시킨 최치원은 신라 하대를 풍미한 유학자로, 유불도 3교의 혼융적 경향을 띤다는 것이 그의 사상을 대변해 주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최치원은 868년 12세의 조기 유학생으로 당나라에 갔다. 10년 안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라는 아버지의 엄훈에, 그는 당의 수도 장안에서 6년 간 남들이 하는 노력의 10배를 하여, 18세에 황금방을 뚫었다.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한 빈공과에서 진사가 된 것이다. 이후 당의 관리로서 선주 율수현위와 고병의 종사관을 지내면서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간이나 해외에 체류하였다. 그는 재당시절 <중산복궤집>・<4・6집>을 만들면서 또 <계원필경집>을 엮으면서 이미 동아시아의 문장가로서의 자부심이 고양되어 있었다.

귀국하여 ‘시독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원학사’를 역임하고 곧 지방관으로 나아갔는데, 이는 정치가로서의 최치원보다는 문장가로서의 최치원을 기대한 이들의 질시 때문이었다. 그 역시 자신이 남긴 글이 후대에까지 자신을 평가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학자로서 현실정치의 개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897년 시무10여조의 정치개혁안을 진성여왕에게 올리고 있다. 가납되어 아찬에 제수되었다고 하는 것은 개혁안을 실행할 의지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벼슬에 미련이 없어진 그는 전국을 유랑하며 재미있는 이야기와 글도 남기고 석각도 여러 곳에 새겨놓았다. 그는 결국 가족을 데리고 해인사로 은거하게 되는데, 병도 다스리고 병난도 피하려는 의도였다. 이곳에서 그는 「부석존자전」, 「법장화상전」과 함께 해인사 관련 저술을 하다가 908년 「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끝으로 저술이 보이지 않게 된다. 927년의 「답견훤서」가 최치원 작이라고 한 것은 후대의 부회일 것이다.

이 책은 모두 4개 부로 나누어 최치원의 생애, 역사인식, 「지증대사비문」의 연구, 여설로 구성해 보았다.

제1부는 최치원의 생애에 관해서이다. 먼저 그의 출생지와 최후의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서유구의 「교인 계원필경집 서」에 나오는 옥구출생설의 문제점을 자세히 언급해 보았다. 다음으로 해외체험과 문화수용, 입당 귀국로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신라지식인의 입당귀국로는 대부분 유학승과 유학생들이 다닌 길로 엔닌[圓仁]과 최치원의 기록을 참고하여 썼기 때문에 이곳에 함께 실었다.

제2부는 최치원의 역사인식과 서역인식이다. 먼저 최치원의 역사인식에서는 그의 인식이 미치고 있는 범주가 기자조선까지 임을 밝히고 신라사 인식에 대한 김부식과의 차이 일연의 고운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 그리고 그의 현실적인 역사인식 등을 고찰하였다. 특히 그의 3교 융회적 경향은 재당시절부터 유불도 각각의 역할분담론을 인식하고 있었음에 주목하였다. 그가 유학자로서 3교 융회적인 경향을 보인 것은 거사불교를 행한 고려시대에 이르러 유학자들의 전범으로 추앙받았음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신라 지식인들의 서역인식에서는 주로 그의 저술에 나타나는 서역에 관한 인식을 범어와 범력을 대표적인 예로 살펴 보았고, 아프라시압 한국인 사절도가 고구려가 아닌 신라사신단을 그린 것으로 판단해 고증해 보았다. 특히 「법장화상전」에 나오는 내용을 많이 원용하여 살펴보았으므로 이를 그의 역사인식에 함께 실어 보았다.
제3부 「지증대사비문」의 연구에서는 우선 이 비가 보물 제138호에서 국보 제315호로 승격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그 찬술과 건립의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던 내용을 규명하였다. 그리고 이 비문의 여러 본을 대조하고 비교하여 정본을 구하고자 노력해 보았다. 다음으로 지증대사비의 건립을 통해 살펴본 고려의 최치원 만들기에 대해 고구하였고, 경주에 있는 괘릉의 명호에 대한 다양한 인식들을 정리하여 최치원이 곡릉이라고 한데서부터 비롯된 명칭임을 밝혀 보았다.
제4부 여설에서는 최치원의 시대인 나말여초 전환기와 경순왕에 대해 살펴보았고, 고려시대 경주와 신라문화는 고려의 신라 문화 전통의 계승과 고려로 간 신라인, 경주 불교계의 재편과 주요 사찰에 대해 개관해 보았다.

최치원은 해외유학에서의 경험을 배경으로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동아시아적 소통이 될 수 있는 언어인 한문으로 표현하였다. 이에 대해 여러 부정적 견해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논고들은 그가 수많은 저술을 통하여 오늘날까지 신라의 문화의 우수성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신라문화의 특수성을 동아시아를 넘어 중앙아시아・인도에까지 알려준 우리나라 문인의 종조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목차
책머리에

제I부 최치원(857-?)의 생애

제1장 최치원의 생애를 둘러싼 이설(異說)의 검토
- 서유구의 「교인계원필경집서」를 중심으로
1. 머리말
2. 「교인계원필경집서」에 기반한 최치원 연구동향
3. 「교인계원필경집서」의 비판적 고찰
4. 맺음말

제2장 최치원의 해외체험과 문화수용
1. 머리말
2. 정치적 체험과 그 문화의 수용
3. 문화적 체험과 수용
4. 맺음말

제3장 신라지식인들의 입당・귀국로
1. 머리말
2. 신라 지식인들의 입당로
3. 신라 지식인들의 귀국로
4. 맺음말

제II부 최치원의 역사인식과 서역인식

제1장 최치원의 역사인식 연구
1. 머리말
2. 최치원 역사인식의 형성 배경
3. 고려 사서에 남겨진 최치원의 역사인식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4. 최치원의 현실적인 역사인식
5. 맺음말

제2장 신라 지식인들의 서역(西域)인식
1. 머리말
2. 신라에 정착한 서역풍물(西域風物)에 보이는 인식
3. 범어(梵語)와 범력(梵曆)에 대한 인식
4. 해동과 고려, 아프라시압 한국인 사절도
5. 맺음말

제III부 「지증대사비문」의 연구

제1장 최치원의 「지증대사적조탑비문」 비교 연구
1. 머리말
2. 지증대사비의 건립과 내용
3. 「지증대사비문」의 비교
4. 맺음말

제2장 고려의 최치원 만들기
-「지증대사비」의 건립을 중심으로
1. 머리말
2. 고려의 최치원 만들기
3. 최치원과 「지증대사비」
4. 맺음말

제3장 경주 괘릉(掛陵)의 문헌적 고찰
1. 머리말
2. 신라 왕릉을 둘러싼 논의들
3. 괘릉의 호칭과 능주(陵主)에 대한 문헌적 고찰
4. 곡릉(鵠陵)에서 괘릉으로
5. 맺음말

제IV부 여 설

제1장 나말여초 전환기와 경순왕
1. 머리말
2. 신라 말의 정국과 지식인 동향
3. 경순왕의 즉위 배경
4. 경순왕의 고려 귀부
5. 경순왕 귀부의 역사적 평가 -맺음말을 대신하여-

제2장 고려시대 경주와 신라문화
1. 머리말
2. 고려의 신라 문화 전통의 계승
3. 고려로 간 신라인
4. 불교계의 재편과 경주의 주요사찰
5.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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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김복순
1954년 서울 출생, 동덕여자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학사, 석사, 박사. 동국대학교 국사학과 조교수·부교수·교
수·도서관장, (현)신라문화연구소 소장

▒ 대표 논저
저술
2008, 『신사조로서의 신라불교와 왕권』, 경인문화사; 2002,『한국고대불교사연구』, 민족사; 『삼국유사의 종합적 연구』(공저), 박이정; 1990, 『신라 화엄종연구』, 민족사

논문
2015, 「『삼국유사』 「무장사 미타전」 조의 몇 가지 검토」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36; 2015,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과 신라인」 『신라문화』 45; 2014, 「경주 괘릉(掛陵)의 문헌적고찰」 『신라문화』 44; 2013, 「신라지식인들의 서역인식」 『경주사학』 38; 2012, 「『삼국유사』 「귀축제사(歸竺諸師)」 조 연구」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33; 2012, 「화엄사 화엄석경의 판독과 조합시론」 『신라문화』 40; 2011, 「『삼국유사』 「명랑신인」 조의 구성과 신인종 성립의 문제」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32; 2011, 「4~5세기 『삼국사기』의 승려 및 사찰」 『신라문화』 38; 2010, 「최치원의 역사인식연구」 『민족문화』 34; 2010,「신라의 백고좌법회」 『신라문화』36; 2009, 「『삼국유사』 「진정사 효선쌍미」 조와 일연과 김부식의 효 인식」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30; 2009, 「신라와 고려의 사상적 연속성과 독자성」 『한국고대사연구』 54; 2008. 8, 「고려의 최치원 만들기」,『신라문화』 32; 2008. 2, 「김유신(595~673) 활동의 사상적 배경」, 『신라문화』 31; 2007. 9, 「혜초의 천축순례 과정과 목적」,『한국인물사연구』 8; 2006, 「최치원의 해외체험과 문화수용」,『한국문화연구』 10; 2004, 「안동문화의 형성과 화엄불교」, 『안동학연구』 3; 2003, 「제7차 교육과정에 따른 국사교과서 고대문화에 대한 연구」, 『한국고대사연구』 29